사람들 이야기

과거 어머니 모습은 현재의 내모습

행복한 까시 2016. 4. 8. 07:30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 모습은 늘 일하는 모습이었다.

새벽 같이 일어나 아침 준비하시고, 부엌일을 마치시면 밭으로 나가셔서 일을 하셨다. 점심을 드시고도 잠시도 쉬지도 않으시고, 막간을 이용하여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하셨다. 그리고 또 쉬지 않고 바로 밭으로 나가서 일을 하셨다. 저녁때도 저녁을 다 먹고도 나머지 가족들은 쉬고 있을 때 헤어진 옷가지를 꿰매느라 늘 바느질을 하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논다는 것은 상상을 하지 못했다. 어머니 옆에 있으려면 늘 일하는 어머니를 찾아다녀야 했다. 냇가의 빨래터를 찾아 간다든가 밭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찾아다녀야 했다. 늘 따라다니며 말썽을 일으켜 야단을 맞으면서도 어머니 옆에 있으면 행복했다.


 이렇게 일만 하시는 어머니는 소풍이나 운동회 같은 학교행사에 거의 오시지 않았다.

어쩌다가 행사에 오셨다가도 금방 가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소풍을 가도 나는 엄마 없는 아이처럼 옆집 할머니가 도시락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어머니를 많이 원망했다. 내가 초등학교의 마지막 소풍인 6학년 가을 소풍 때에 처음으로 어머니가 도시락을 가져다 주셨다. 내가 계속 소풍 때 와 달라고 보채니까 큰맘 먹고 한번 와 주신 것이다. 지금 기억으로도 그때의 소풍이 가장 기억에 남고 즐거운 소풍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어머니는 학교에 오시지 않았다. 아니 오실 수가 없어서 못 오셨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할머니 수발에 밥 한 끼 해결 못하시는 아버지 때문에 꼼짝도 못하신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머니 옆에는 일이라는 놈이 항상 따라다니고, 어머니하면 일이라고 하는 수식어가 늘 따라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일만 많이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모든 어머니가 그랬듯이 무척이나 알뜰 하셨다. 장날에도 돈을 아끼시느라 그리 비싸지 않은 국밥도 못 드시고 오셨다. 간혹 아주 시장 하실 때에는 삶은 계란 몇 개로 요기를 하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집에서 곡식 한 알도 버리지 않았으며, 옷이나 양말도 다 떨어져도 기워 입었다. 그 시절 옷을 사주지 않으시는 어머니를 많이 원망도 했었고, 떼도 많이 쓰기도 했다. 그렇게 떼를 썼어도 나에게 돌아오는 옷가지는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돈을 많이 벌면 멋진 옷을 많이 사서 입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아직도 제대로 된 옷가지를 사서 입지 못하고 살고 있다.


 어머니의 이런 부지런함과 알뜰함이 부자는 아니어도 우리 집을 무난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던 것 같다. 요즘 와서 어머니의 부지런함과 알뜰함에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 덕분에 그리 경제적 고통 없이 학업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머니 모습과 닮아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쉴 사이 없이 일만 찾아서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아이들이 놀아 달라고 할 때도 일해야 한다고, 아니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놀아주지 못할 때,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내 머리를 짓누를 때도 과거의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어머니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알뜰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요즘은 돈을 쓰기가 겁난다. 불안한 노후도 그렇고, 아이들이 성장해 가면서 학비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동전 한 닢도 아쉽다. 이렇게 모든 부문에서 절약을 하려고 하니 가끔 스트레스도 받고, 궁상스럽기도 하고, 청승맞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노후에는 더 비참하고, 힘든 생활이 기다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과거의 어머니가 생활하시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과거의 어머니가 미래를 준비했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