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시 이야기

어머니의 성묘

행복한 까시 2007. 2. 23. 18:14
 

 나에게 외갓집이란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외가 쪽에는 삼촌도 없고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외가 쪽의 친척이라고는 달랑 이모 한분만 계신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외가에 대한 유년시절의 기억은 전혀 없다. 한 가지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내가 다섯 살 정도 되었을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은데, 외할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어머니가 서럽게 우시던 모습이 아주 가물가물하게 기억이 날 뿐이었다.


 외갓집은 우리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원도에 있었다. 말하자면 그곳이 어머니의 고향이다.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고향은 어머니의 외가가 사는 동네였다. 아마도 외할아버지 친척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외할머니의 친척이 많은 곳에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내가 어머니의 고향이자 나의 외갓집이 있는 동네를 처음 방문한 때는 대학생 때로 기억이 된다. 그 때는 어머니가 사시던 고향을 방문한다는 생각에 많이 들떠 있었다. 외가가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뿌리에 대해 나름대로 호기심도 있었고, 궁금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즐거운 마음으로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시며 설명해 주기 바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의 고향 동네를 방문했는데, 동네 사람들이나 친지들이 다정다감하고  반갑게 맞아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그리 낯설지 않고, 친숙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의 먼 친척뻘 되시는 오라버니들과 함께 어머니의 어린시절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셨다. 옆에서 듣는 나도 또한 옛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 때의 감동을 글로 표현해서 방송국에 어머니의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원고료을 받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어머니도 명절 때에는 꼭 고향으로 성묘를 가신다. 그동안 시집살이에 억눌려서 친정 부모님께 자식노릇도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으셔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뿐만 아니라 우리 형제들도 꼭 데리고 다니셨다. 아들이 없으셨던 외할아버지께 아들을 셋이나 두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으신 것 같다. 그동안 어머니는 명절 때 얼마나 부모님께 성묘를 하고 싶으셨을까 하는 마음을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간다. 사실 어머니는 이모와 단둘 밖에 없으셔서 항상 제사를 못 지내는 것을 평생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모도 매번 성묘를 오신다. 가끔 시간이 맞으면 이모를 만나기도 하는데, 최근에는 거의 만나지를 못하고 있다.


 성묘를 다녀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처음 어머니와 성묘를 왔을 때에는 외할아버지 묘에 쉽게 올라갔는데, 해가 가면 갈수록 아버지도 어머니도 산에 오르시는 것을 힘겨워하신다. 어머니는 작년 여름에 허리를 다치신 이후로 더욱 힘들어하신다. 그렇게 힘들어 하시면서도 성묘를 다녀온 것이다. 아마 내년에는 성묘를 하러 갈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번 설에도 성묘라는 행사를 강행한 것 같다.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산을 오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며 이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도 연세를 많이 드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은 예전에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과 교차되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디로 가시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다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항상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만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세월이라는 놈이 늙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으로 데려다 놓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