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시 이야기

어린시절 아버지의 거짓 약속

행복한 까시 2007. 8. 9. 10:54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여섯 살 정도 되었을 때로 기억된다. 그 시절만 해도 생필품은 5일장을 통해서만 구입되던 시절이었다. 어른들이 용당장(시골 5일장 이름)에만 다녀오면 요술항아리처럼 보따리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옷, 신발, 농사도구, 그릇 등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면 무엇이든지 나왔다.


 도대체 용당장이란 어떤 것이기에 어른들이 신기한 물건이 나올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그런 의구심은 내가 중학교를 장이서는 읍내로 다니고 나서야 말끔히 해결되었다. 처음 용당장을 구경하고 나서 실망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차라리 용당장을 보지 않고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장에 갖가지 물건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파는 것이 전부였다. 도회지에서는 공산품을 가져다 팔고, 시골에서는 농사지은 농산물을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거의 모든 사건이 그렇듯이 마음속에 있고, 미지에 있을 때에는 크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경험해 보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용당장을 통해 절실히 경험했다.


 이렇게 용당장에 대한 커다란 환상을 가지고 있을 때 아버지께 색실을 사다 달라고 졸랐다. 옆집 친구가 가지고 놀던 색실이 너무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용당장에 가면 색실 좀 사다줘, 갖고 놀게”

 “그래 꼭 사다 주마”

아버지의 대답이 못미더워 다시 한번 다짐을 하였다.

 “정말 사다 줄 꺼지”

 “그럼 꼭 사다 준다니까”

그 대답을 듣고, 기분이 좋아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놀면서도 빨리 장날이 와서 아버지가 색실을 사왔으면 하는 생각이 간간히 들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장날이 왔다. 아침부터 장에 가신 아버지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날은 왜 이리 시간이 더디 가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놀아도 해는 그대로 인 것 같았다. 해가 서산에 걸려야 아버지가 오시는데 하면서 해가 넘어가기만 기다렸다. 늦은 오후 드디어 아버지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너무나 반가웠다.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보따리부터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색실은 없었다. 그 대신 보따리에 형의 도시락과 예쁜 숟가락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화가 너무 나서 왜 색실을 사오지 않으셨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억울해서 울음만 나올 뿐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버지가 미울 뿐이었다. 계속 울고 있으니까 할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은 내가 숟가락이 탐이나서 우는 줄 알고 숟가락을 내가 주며 달랬다. 하지만 숟가락은 내게 그리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나의 마음은 오로지 색실을 사오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가득 차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어른들을 믿지 않게 되었다. 어른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것이었다. 그 전에도 물론 어른들이 거짓말을 했겠지만 인지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 때부터 서서히 어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어른들의 말을 되새겨 듣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그때의 충격으로 어른들이 거짓말을 해도 그럴 수 있다고 마음 한 켠을 접는 아량도 생겼다. 어른들의 거짓말을 일찍 깨달은 것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기도 하다. 그때 아버지는 왜 색실을 사오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아마도 아버지는 나와의 약속을 하찮게 생각하고 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설령 잊지 않았다고 해도 어린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색실이 아버지에게는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올 필요성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오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나 돈이 부족해서 사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관심사가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에게 거짓말이나 공허한 약속에 대한 실망은 너무도 크다. 어른들의 세계는 넓어서 거짓말도 쉽게 잊을 수 있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너무 작기 때문에 그 약속이 아이들에게는 전부이기 때문에 쉽게 인정하거나 잊기 어렵다. 그래서 상처가 너무 큰 것이다.


 이 사건 때문에 나는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아주 하지 않기는 어렵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또한 아이들에게 거짓말이 나쁘다는 것과 약속을 어기는 일은 나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이다. 그리 일관성 있게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도 거짓말이나, 공허한 약속은 하지 않는 편이다. 살아가면서 사람들 사이에 신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