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야기

세수를 하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행복한 까시 2007. 9. 29. 14:19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다가 보면 문득 문득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의 세수에 대한 행동이 철저해서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20년이 되었는데도 가끔 생각이 난다. 그 때문에 세수를 하다가 보면 어린시절 세수할 때 옆에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는 것이다.

 

 “얼굴을 깨끗이 씻어라. 모가지도 닦구. 귀부리까지 싹싹 닦아라.”

 “세수를 하지 않으려면 밥 먹을 생각도 하지 마라”

 “세수를 하지 않고 밥을 먹는 것은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할머니의 세수에 대한 철학은 대단했다. 우선 우리 형제들이 세수를 하지 않으면 밥상머리에 앉히질 않았다. 그래서 아침을 먹으려면 세수는 기본으로 해야 했다. 그런 습관 때문에 밥을 먹으려면 당연히 세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있다. 가끔 친구집에 가서 세수를 하지 않고 밥을 먹는 친구들을 보면 이상하기까지 했다. 그런 습관 때문인지 어쩌다가 세수를 하지 않고 밥을 먹으려면 무엇인가가 빼놓은 것처럼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얼굴이 개운하지 않아 밥을 자연스럽게 먹지 못했다. 지금도 집사람은 밥먹기전 꼭 세수하는 내 모습을 보며 할머니가 세수하는 습관을 잘 들여 놓으셨다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할머니에게는 세수하는 것만 중요한 것이다. 세수를 하려면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할머니의 철학이었다. 얼굴은 기본이고, 목, 귀까지 깨끗이 닦도록 했다. 우리에게만 강요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 자신도 정갈하셨다. 어쩌다가 할머니가 세수하시는 것을 관찰해 보면 얼마나 정성껏 하시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먼저 비누를 이용하여 얼굴을 깨끗이 닦으신다. 얼굴을 닦으시고, 목, 귀까지 깨끗이 닦으신다. 그 다음 머리에 물을 묻혀 정갈하게 마무리를 하신다. 할머니의 세수 시간은 보통 사람들 서너배 이상 소요된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할머니는 머리도 정갈하게 빗으셨다. 1898년에 태어나신 조선의 여인답게 비녀를 꽂아 쪽진 머리를 하셨다. 그 쪽진 머리를 90년 평생동안 하고 사셨다. 할머니 사전에 머리를 자른다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한 할머니의 머리에 대한 가치관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도 머리를 자를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세수를 하고나서 큰 거울을 앞에 놓고 참빗으로 머리를 빗을셨다. 가름마도 얼마나 정갈하게 타시는지 조금도 비뚤어지지 않았다. 동백기름을 발라서 머리카락이 한올도 새나오지 않았다.


 머리의 정갈함에 맞추어 옷도 정갈하게 입으셨다. 조선의 여인답게 하얀 한복으로 챙겨 입으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한복을 지어대느라 바느질을 달고 사셨다. 농사일을 하시며 틈만 나면 할머니 한복 짓느라 바느질을 하셨다. 정갈한 할머니를 모시는 어머니는 늘 일감이 많았다. 할머니는 집안도 늘 깨끗이 치우셨다. 방도 틈만 나면 쓸고 닦았다. 그래서 방안은 깨끗했지만 늘 개구쟁이로 노는 우리들은 불편했다. 시골에서 뛰놀다 보면 옷에 흙이 묻었다. 흙이 묻은 채로 집으로 들어가면 할머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아버지를 양자로 들이셨기 때문에 손자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할머니의 손자들에 대한 애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의 잔소리를 한쪽귀로 듣고 한쪽귀로 흘렸다. 흙을 나르는 우리 형제들과 쓸고 닦아내는 할머니와는 늘 다툼이 지속되었다. 한편으로는 할머니가 너무 완벽한 것을 추구하고, 깨끗함을 추구하다가 보니 할머니 생전에 자식이 없었을 것이라는 속설이 맞다는 생각도 든다.   


 오늘 아침에는 쉬는 날이라 늦잠을 잤다. 대충 세수나 하고 밥을 먹으려고 욕실에 들어서니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난다. 대충 세수하려는 나에게 얼굴 구석구석까지 깨끗이 닦으라고 하시던 할머니 말씀이 생각났다. 하는 수 없이 얼굴 구석구석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나온다.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가끔 세수를 할 때면 할머니 말씀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오늘도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욕실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