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야기

어머니에 대한 서글픈 기억의 조각들

행복한 까시 2008. 5. 8. 08:09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아마도 자식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의 크기만큼, 아니면 자식이 어머니에게 갖는 사랑의 크기만큼 아픔은 더 큰 것 같다. 아픔의 크기가 사랑의 크기가 되는 것이다. 오늘도 어머니는 뙤약볕 아래서 밭일을 하고 계실 것이다. 이제는 그런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려 다른 생각조차 하실 수 없는 삶 그자체가 되어버렸다. 어머니하면 떠오르는 삶의 조각들을 떠올려 보았다. 모두 가슴속을 파고드는 애절한 기억들뿐이다. 왜 좋은 기억은 남지 않고, 슬픈 기억들만 남든 것일까?


 # 먹거리......


 어머니는 항상 일찍 일어나 물을 길어서 아침 준비를 하셨다. 그 당시 시계를 볼줄 몰라서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아주 이른 새벽으로 기억이 된다. 여름에 해가 뜨기 전이니까 아마도 5시 전이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기억 나는 것은 아침에 감자를 숟가락을 이용하여 깍는 것이었다. 사각사각, 득득 감자껍질 벗기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 온다. 오늘도 어머니는 밥에 감자를 놓아서 감자밥을 지으려고 하시는구나하며 잠자리에서 생각한다. 어쩌다가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서 어머니가 감자 깍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적도 있다. 이렇게 새벽부터 감자를 깍는 이유가 부족한 쌀이나 보리 등 곡식을 절약하기 위해서 마련하시는 우리의 식량이란 것을 나중에 성장해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엄마의 밥그릇은 항상 누룽지나 아니면 보리쌀, 좁쌀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족들의 밥을 다 퍼주고 난 다음의 나머지가 어머니 몫이었다. 밥이 적게 남으면 적게 드시고, 많이 남으면 많이 드셨다. 그리고 고기, 김, 계란 등의  반찬은 입에 대지도 않으셨다. 어리석게도 나는 엄마가 누룽지, 좁쌀, 보리쌀은 좋아하시고 고기, 김, 계란 등은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지내 왔다. 불과 최근 몇 년까지도 말이다.


 # 옷가지......


 엄마는 항상 반짓고리를 끼고 사셨다. 비가 와서 들일을 못하시거나 겨울에도 시간만 나면 바느질을 하셨다. 할머니가 조선시대처럼 하얀 한복을 입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그 한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번 입고 나서 빨래할 때면 전부 뜯어야 내야한다. 뜯어서 세탁을 한 다음 풀을 먹여서 다듬이질을 하고 인두로 대려가며 다시 꿰매야 옷이 완성된다. 다시 말하면 빨래를 할 때마다 옷을 새로 만들어서 입는 것이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는 정말로 훌륭했다. 그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우리 할머니가 별탈 없이 옷을 입으신 것을 보면 말이다. 그때는 그렇게 한복을 지으시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 었다. 요즘은 빨래하는 것도 힘들다며 모든 빨래를 세탁기나 세탁소에서 하는 시대가 아닌가? 그뿐만 아니다. 그 때는 헤어진 옷도 모두 꿰메서 입는 때라 유난히 바느질거리가 많았다. 피곤 하셔서 졸음을 참으면서 바느질 하신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 스타일......

 

 어머니는 항상 머리를 길러서 뒤로 올리고 다니셨다. 철없는 나는 어머니는 머리 스타일에 관심이 없이 사시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파마를 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고, 파마를 하지 않으면 돈이 절약되기 때문이었다. 새색시 적에 어머니는 파마를 무척이나 하고 싶은 보통의 여성이었던 것이었다. 보통의 여성들처럼 화장도 하고, 멋진 헤어스타일을 뽐내고 싶은 그런 마음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일만 하고 사시는 그런 분인 줄로만 알았다. 나 역시 시골 생활만 보아왔고, 우리가 사는 시골 생활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어머니도 그러한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니었다. 도회지의 생활을 동경하고 사신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꿈꿔 왔던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었다. 그때부터 어머니가 정신적으로도 힘들게 사신다는 것을 아주 조금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머니가 시골에 사는 것을 아주 당연시 여겼는데, 엄마는 시골로 시집온 것에 대해 몹시 후회하고 여태까지 사셨던 것이었다. 아버지가 들으시면 섭섭해 하실지 몰라도 어머니 마음속에는 도회지에서 멋지게 사는 삶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 사셨던 것 같다.



 # 객지에서.....


 객지 나가서 공부하느라 어머니 모습을 자주 볼 수 없었다. 처음에 서울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어머니가 너무나 그리웠다. 같이 있을 때에는 그리 어머니의 소중함을 몰랐다. 어머니도 나처럼 객지 나가 있는 이 못난 자식을 자나 깨나 생각하셨을 것이다. 철없던 시절 어머니에게 자식에게 관심도 없다는 말을 하고 호되게 야단맞은 기억이 난다. 자나 깨나 자식을 생각하며 사셨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시니 속도 상하시고, 억울하기도 하셨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머니는 내가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마다 이 세상 어떤 어머니 보다 마음속으로 많은 기도를 하시고, 하루 종일 자식생각만 하신 것이다.  


 객지 나가니 엄마 생각이 무척이나 났다. 비 오는 날은 고향 생각과 어머니 생각에 괜히 눈물이 난 적도 있다. 엄마가 너무 그리워서 말이다. 특히 아플 때 엄마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어머니만 옆에 있어도 금방 병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학교를 다니며......


 어머니는 내 대학 학비를 보태느라 더욱 힘들게 일하셨다. 아버지, 형과 함께 말이다. 특히 사립학교라 학비가 비쌌다. 공부를 더 잘했으면 국립대를 가서 학비가 저렴했을 텐데, 철부지인 나는 그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립학교를 다녔다. 방학 때 고향으로 갈 때면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 밖에 들지 않았다. 집에서 돈 가져오는 것이 꼭 죄인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졸업하고 나면 돈 많이 벌어 어머니, 아버지, 형을 많이 갖다 드린다고 그때는 다짐했건만, 지금은 이한가정 꾸려가기도 힘겹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항상 어머니는 즐겁게 일하셨다. 나를 공부시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행복해하셨다.



  # 지금은.....


 내가 졸업하고 나서 어머니는 좀 여유를 찾으셨다. 맛난 것도 사드시고, 여행도 가끔 다니셨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았고, 내 마음을 행복하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 어머니를 할머니로 만들어 놓았다.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어머니 모습에 나 자신도 놀랄 때가 많다. 가끔 볼 때마다 예전의 할머니 모습과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매일 일만 하신다고 우리 형제들이 그렇게 원망하고, 어머니를 놀려댔는데, 이제야 조금씩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다. 엄마의 삶이 왜 그랬는지, 왜 그렇게 사실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해답은 아주 우리들 가까이에 있었다. 바로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과거 어머니가 살았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이었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