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시 이야기

어린시절 너무나도 무서웠던 아버지 생각

행복한 까시 2008. 11. 3. 15:42

 아버지, 어머니, 형 셋이서 나무를 하러 가셨다. 점심때가 지나서 내가 밥을 가져가기로 하였다. 밥을 준비하다가 보니 밥이 늦어 버렸다. 헐레벌떡 밥을 가지고 산으로 갔다. 급하게 서둘러서 갔지만 점심때가 훨씬 지나간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형은 밥이 늦었다고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특히 아버지의 화난 표정은 눈에서 금방이라도 번갯불이 튈 것 같은 기세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무서워서 고개를 돌렸다. 밥통을 열어보니 밥이 조금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먹어도 모자랄 정도의 밥이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어머니는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 얘야 밥은 아버지와 형주고 우리는 집에 가서 묵이나 먹자.”

 그러면서 어머니는 배가 고팠을 텐데 연신 아버지 눈치만 살핀다. 아버지의 화난 모습이 너무도 무서워서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 보니 꿈이었다. 나도 모르게 휴 한숨이 나왔다.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이것이 어린 시절의 한 단면이었다. 아버지는 나와 가족들에게 늘 화내는 존재였다. 밥을 먹을 때에도 반찬의 간이 맞지 않거나 밥이 조금이라도 되거나 질어도 화를 내셨다. 밥에서 돌이라도 나오는 날에는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아버지가 심부름을 시켰을 때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난리가 났다. 예를 들어 망치를 가녀 오라고 해서 바로 가져가지 못하면 난리가 났다. 그래도 우리 형제들이 모두 동원해서 망치를 찾아야 했다. 우리 형제들도 못 찾으면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찾아야만 했다. 이처럼 그리 크게 화를 내지 않아도 될 일에도 아버진 화를 많이 내셨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밥상머리에서 절대로 음식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식사 시간의 즐거움을 망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즐겁게 밥을 먹는데 갑자기 싸늘한 분위기가 되는 것을 무수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좋은 기억보다는 화나고 무서운 기억 밖에 없다. 좋은 기억이라면 내가 학교에서 성적을 잘 받아왔을 때 흐뭇해하시던 모습, 그리고 외출했다가 오시면서 먹을 것 사가지고 오시는 것이 거의 전부였다. 그 외에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화내는 기억 밖에 없었다. 그래서 늘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 아버지가 방에 계시면 다른 방으로 옮겨 다녔고,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밖으로 나가고, 아버지가 밖에 계시면 집으로 들어와 할머니 옆에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와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있어 든든한 우산이었다.   


 집에 있으면 늘 불안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늘 가슴을 졸이며 살았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성격이 내성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살아왔다. 남들이 강하게 주장하면 그냥 따르는 식의 성격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주위의 눈치를 너무나도 살피는 식으로 변한 것이다. 지금의 내 보습을 보면 물 같은 성격으로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나게 변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변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어찌 보면 아주 직장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도 가슴 속에는 깊은 곳에는 이게 아니라며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사실 무서운 아버지를 밑에서 아버지 비위를 맞추고 살다가 보니 웬만큼 까다로운 상사도 잘 맞추고 지낸다. 여러 가지 유형의 상사를 잘 맞추는 편이다. 상사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빨리 감지해 내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을 해 왔다.


 아버지의 성격을 맞추고 살라는 것이 내 운명인지 몰라도 직장에서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와 비슷한 상사와 일한 적이 있었다. 나도 속으로는 무척 싫었지만 잘 견디고 맞추어 내었다. 다른 동료들이나 후배들이 다들 싫어서 피해 다녔어도 나는 꿋꿋이 버텨냈다. 오히려 일을 배우려고 더 옆에서 보좌를 하면서 일을 배웠다. 그 때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느냐고 놀리기도 하고 비난을 하였지만, 나는 일을 배우려는 욕심으로 무사히 그 고통을 감내했다. 지금은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끔직스런 일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벗어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권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였다.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아버지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마음이 편안했다. 마치 마음속에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은 것처럼 홀가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속에 걱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였다. 새로운 서울 생활을 해야하는 것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촌에서 살다가 서울에 오니 약아빠진 서울 아이들과 경쟁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 환경이 전혀 다른 도회지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도 그리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다. 어쨋든 집에 오면 마음은 편안안 상태가 계속되었다.    

 

 아버지와의 어린시절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다. 그래도 어린시절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따뜻한 할머니와 어머니가 무서운 아버지의 존재를 희석시켜 주었다. 만일 할머니와 어머니의 따스함이 없었다면 성격이 삐뚤어지거나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또 생각해 본다.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의 트레이닝이 사회에 나와서 힘든일도 겪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도 한다. 현재의 나는 아버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해 긍적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써 노력을 한다. 그리고 엄하고 무서웠던 아버지였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애틋한 것도 잘 알고 있다. 단지 자식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인색했던 것 뿐이었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내려 놓고 싶다. 그리고 마음속에 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도 내려 놓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