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시 이야기

“여자”라는 별명이 괴로웠던 어린시절

행복한 까시 2008. 12. 6. 15:04

 큰 딸아이가 하교하자마자 가방을 내려놓으며 외친다.

  “ 아휴 짜증나 죽겠어. 아빠.”

  “ 왜 그러는데?”

 순간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하며 걱정스런 마음으로 물어 보았다.

  “ 월요일 아침 방송실에 가서 우리 반 영철이와 같이 발표해야 돼.”

  “ 선생님과 애들이 영철이와 잘 어울린다고 놀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고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유별난 시기라 이렇게 놀리는 것에 극도로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는 큰딸이다.


  “ 그게 뭐 어때서. 잘됐네. 영철이는 공부도 잘한다며.

    영철이와 친하게 지내. 남자 여자를 떠나서 친하게 지내면 좋은 거야.

    그리고 친하다고 결혼 하는 것 아녀. 남자와 여자를 너무 구분 짓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란다.”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아이들이 이렇게 놀리면 짜증이 날 것이다. 그 시절에는 누구는 누구를 좋아한다고 놀리면 재미있어 죽던 시절이었다. 초등시절 유난히 놀림을 많이 당한 나는 큰 딸아이의 심정이 가슴에 더욱 절실하게 파고든다.


 어린시절 나는 목소리가 가늘었다. 외소한 몸과 예쁘장한 얼굴을 가졌다. 요즘 같으면 꽃미남이란 소리를 들었을 법도 하지만, 그 시절에는 꽃미남은 남성들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 시절에는 남자답고 씩씩한 것이 남성의 상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위에 누나 두 명이 있어 누나들하고 놀다가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투라든가 행동이 여자처럼 보였던 것 같다.


 이런 내 모습은 초등학교 친구들이나 선배들에게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항상 놀림감이 없나하며 호시탐탐 노리고 다니던 친구들에게는 좋은 놀림감이었다. 마치 표범이 먹잇감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는데 저 멀리 비실거리는 한 마리의 사슴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달려드는 표범처럼 친구들은 심심하면 나를 향해 벌 떼처럼 달려들어 내 마음을 할퀴고 찢으며 상처를 내고 달아났다.


 주로 별명은 ‘여자’, ‘아가씨’, ‘색시’, ‘계집애’등등 여자와 관련된 단어들이 총 등장하였다. 그 당시 여자라는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 당시 보수적이었던 시골에서 남자에게 여자라고 하는 것은 심한 모욕이었다. 어른들은 좀 못난 남자를 보면 흔히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 야 거시기 떼어버려라.”

  “ 남자가 여자처럼 굴면 거시기(부랄) 떨어진다.”

  “ 남자가 부엌에 드나들면 거시기 떨어진다.”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듣고 자란 우리들은 여자처럼 행동하면 정말로 남자의 생식기가 떨어지는 줄 알 정도였다. 이런 환경 때문에 여자라고 놀리는 것은 나에게 있어 엄청난 모욕이었다. 나는 놀리는 아이들과 매일 싸웠다. 힘이 부족한 나는 젖 먹을 힘조차 다해서 싸웠다. 그런 오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하다.


 놀리는 친구들을 향해 돌도 던지고 막대기로 머리를 힘껏 내리치기도 하였다. 한번은 누나의 친구를 막대기로 쳐서 머리에 피가 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며 무척이나 위험한 짓이었다. 그래도 학교 친구들과 선배들은 심심하거나 틈만 나면 나를 놀려댔다. 나는 약이 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약이 올라하면 할수록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재미있어서 더 놀려대는 것이었다. 내가 약올라하면 할수록 놀리는 사람들은 더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놀리는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약올라하면 할수록 더 재미있어 하고 더 놀리는 것이었다. 그때 무릎을 탁치며 깨달았다. 도인들이 도를 깨우친 것처럼 깨달은 순간이었다. 친구들이 나를 놀릴 때 재미가 없게 하면 된다고 터득한 것이다.


 그 후 친구들이 여자라고 놀리면 한술 더 뜨는 반응을 보였다.

  “ 그래, 나 여자다 어쩔래?”

  “ 내가 여자인지 이제 알았냐?”

 하거나 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거나 무시하였다. 그랬더니 거짓말처럼 놀리는 것이 줄어들었다. 그 후로는 놀려도 재미가 없자 서서히 놀리는 횟수도 줄어들고, 친구들 사이에서 여자라는 별명이 서서히 잊혀져 갔다. 


 딸아이에게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놀리면 반응을 보이지 말고 아이들을 재미없게 해주라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들이 놀리는 진흙탕 속으로 빠져버리면 더 이상 아이들이 놀리지 않을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랬더니 큰딸 아이는 방법을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떡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