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풍경

저녁노을을 보면 생각나는 것들

행복한 까시 2007. 12. 1. 06:25
 

 지친 몸을 이끌고 화장실에 갔다. 벌써 저녁나절이 되었나 보다. 서향으로 위치한 화장실 창문 사이로 빨갛게 물든 저녁 햇살이 한 줌 들어온다. 요즘은 햇빛도 볼 수가 없다. 마치 창살 없는 감옥 같다. 사무실이 건물의 한가운데 위치하여 밖을 전혀 볼 수가 없다. 밖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오직 벽에 걸린 캐릭터 시계만이 낮인지 밤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화장실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니 문득 어린시절의 삽화가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고향의 저녁노을도 아름다웠다. 특히 낮의 길이가 짧아지는 이맘때의 저녁노을은 더욱 아름다웠다. 색깔도 더 선명하고, 산봉우리에 걸린 태양의 모습도 더 아름답게 보였다. 저녁때가 되면 어김없이 태양은 국사봉으로 넘어갔다. 국사봉에 걸린 태양의 모습은 황홀하기만 했다. 황홀하다 못해 신성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그 산을 신성시하고 정월 초에는 산제사까지 지낸 것 같다. 화투에 그려져 있는 일월 일송의 소나무처럼 생긴 봉우리에 태양이 걸려 있는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이었다. 그 동양화를 감상하고 있으면 저절로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편안해 졌다.   


 시골집에는 서향으로 문이 나 있는 사랑방이 있었다. 사랑방에는 할머니가 주로 기거하셨다. 겨울에는 그 방이 거실처럼 쓰였다. 저녁나절이 되면 그 방은 햇빛으로 유난히 밝았다. 문창호지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서향으로 위치한 사랑방은 유난히 밝은 빛을 품어 내었다. 할머니는 연세가 많아 거동이 불편했다. 이웃집 할머니들이 오셔서 할머니에게 말벗도 해주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며느리 이야기, 과거 시집살이 이야기를 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사랑방의 햇살이 밝게 비치면 할머니의 이야기도 무르익어 갔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저녁노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저녁노을이 문창호지를 두드리면 할머니들은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도 저녁노을을 볼 때면 할머니들이 손에 뒷짐을 집고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사랑방 문에는 작은 손바닥만한 유리가 붙어 있었다. 예전에는 모든 문이 다 그랬다. 창호지로 문을 바르면 밖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 때문에 손바닥만한 유리를 중간에 붙여 넣었다. 그 유리를 통해 문을 열지 않고 밖을 볼 수가 있었으며,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 할 수가 있었다. 가끔은 나쁜 장난을 하거나, 화투 놀이를 할 때 아버지가 오시는지 정탐하기 위해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다.


 창호지에 붙어 있는 작은 창으로 저녁노을을 보았다. 작은 창으로 보는 노을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 노을이 비추는 시간에 밖에서 놀다가 차가워진 손을 녹이는 시간이다. 아니면 밥을 먹고 작은 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간이다. 그 시절에는 저녁을 일찍 먹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태양에 따라 생활이 지배당하는 시기였다. 전기가 없으니 집은 늘 어두웠다. 그리고 알뜰하신 어머니는 석유 한 방울이라도 아끼려고, 해가 있을 때 가족들의 저녁을 해결 하신 것이다. 그래서 해가 짧은 겨울에는 늘 저녁을 일찍 먹었다. 


 밝은 조명은 사람의 기분을 맑게 해 준다. 학창시절에도 밝은 조명이 있는 도서관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많아 한 것은 아니지만 밝은 조명이 비치는 도서관이 공부에 집중이 잘 되어 좋았다. 도서관의 조명처럼 사랑방의 조명도 밝았다. 태양이 창호지를 통해서 제공한 자연조명은 은은해서 좋았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 것도 아니고, 창호지가 적절하게 햇빛을 걸러서 환한 방을 만들어 주었다. 도서관처럼 집중이 잘 되어 할머니들이 오시지 않는 날이면 그 방에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놀았다. 밝은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숙제를 하면 능률도 더 올랐다. 밝은 조명은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는 마력이 있다.


 작은 창으로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자연의 신비로움에 취한다. 태양을 계속 보고 있으면 아주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보인다. 어린시절 산만한 행동 때문에 태양을 오랫동안 지켜보지 못했다. 태양을 한참 보고 있다가 잠시라도 눈을 떼면 태양은 저 만치 가서 있다. 태양이 지면서 생기는 저녁노을은 장관이다. 특히 구름이 적당이 끼어 있으면 더 아름답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건만 한순간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것 또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태양은 인간에게서 참으로 위대한 존재이다.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 존재를 가끔 잊고 살지만 한순간 기억해 보면 태양은 괴로운 기억보다 즐거운 기억이 더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