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야기

고향을 지키는 형님을 보면 눈물이 난다.

행복한 까시 2009. 9. 5. 10:13

 얼마 전 휴가 기간에 형의 손을 볼 기회가 있었다. 구리 빛으로 까맣게 그을린 손에 정맥이 울퉁불퉁하게 튀어 나와 있었다. 이 손을 보는 순간 형의 고난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책으로도 출간되었듯이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가 이렇게 힘든 것일까? 아니면 모든 가족의 고통을 혼자 짊어져서 그런가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형은 우리 집안의 장남 이다. 장남이라는 굴레 때문에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일을 한다. 장남이라는 울타리 때문에 도회지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살다가 때로는 농사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후회와 탄식으로 오십년의 세월을 살았다.

 

 힘들어 하는 형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형 예전에 도회지로 나가지 그랬어요? 그러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형이 대답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지. 그런데 여기 선산과 부모님이 계시쟎니? 자주 와서 부모님도 들여다 보고, 선산도 관리하려면 그게 더 힘들 것 같더라구. 그래서 여기 눌러 앉은 거야." 

 형의 가족들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에 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형은 마음씨가 너무 착하다. 다른 말로 하면 집안일에 지나칠 정도로 순종적이었다. 가난한 집안을 위해 학교도 중학교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고, 그 짧은 학교 다니는 기간에도 집에 모내기가 있는 날이나 벼 타작을 하는 날, 집안에 바쁜 농사일이 있는 날은 학교를 가지 않고 부모님을 거들었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집안의 모든 궂은일은 도맡아 가며 했다. 집안 일 뿐만 아니라 동네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했다. 동네 어른들을 위험한 일에서 구출하기도 하였고, 동네의 위험한 일도 많이 하였다. 형이 이처럼 열심히 일하였기 때문에 우리 집안이 잘 살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살 수 있는 기반이 된 것 같다. 형이 있었기에 형 아래 동생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형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형과 함께 했던 추억이 많이 생각난다. 어린시절 형이 혼자 산으로 나무하러 가기 싫어서 나를 데리고 다녔다. 형을 따라가면 형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그 때 산에서 먹던 라면 맛과 김치 볶음밥은 정말로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리고 가끔 형이 기분이 나면 새총도 만들어 주고, 팽이도 만들어 주던 기억이 난다. 또한 밭으로 일하러 갈 때에도 같이 가면 형이 무척 좋아 했다. 내가 가도 일하는 데는 별로 도움은 안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 일하는데 말벗이나 하려고 했던 것 같다. 형도 어린나이이다 보니 얼마나 친구들과 놀고 싶었겠는가? 그리고 얼마나 심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형이 많이 힘들어한다. 형수가 많이 아프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아픈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아프기 때문에 더욱 힘들어하는 것 같다. 이런 형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도 아프다. 그렇게 고운 마음씨를 가진 형의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 나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한다. 한 평생을 우리 가족을 위해 희생한 형이기에 더욱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그러게 마음이 아프면서도 휴가 때에도 내색도 하지 않는다. 단지 얼굴이나 육체적으로 그늘만 드리우고 있다. 이런 것들 때문에 형을 떠나올 때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형의 아이들인 조카들이 심성이 곱고 바르게 자라서 한편으로 위안이 된다.


  나에게 있어 형은 동네에 말없이 서있는 큰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힘들고 지칠 때 쉴 수 있고, 언제든지 달려가 기댈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세상의 모든 형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매일 형에게 잘해드려야지 해도 마음뿐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있다. 오늘 형의 거친 손을 보며 우리 집안의 기둥이 되기 위해 얼마나 힘든 인생을 보냈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