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야기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사시는 어머니

행복한 까시 2009. 9. 12. 13:05

 어머니나 아버지의 인생사를 들어보면 꼭 한편의 소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님들은 일제의 침략에 지배를 받아왔고, 한국전쟁을 겪으셨기 때문에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통적인 가치관의 변화시기에 사신 분들이라 더욱더 그러하다.

 

 우리 어머니도 소설 같은 인생을 사신 분이다. 어머니를 1인칭으로 하여 어머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는 강원도 원주 근처의 산골에서 살았어.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과일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집에서 살았지. 고향의 봄에 나오는 마을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매우 자상하시고, 손재주도 많으셨지, 아마 너희들이 그 손재주를 닮은 것 같어. 그런데 그놈의 술이 문제였어. 술만 드시면 어머니를 개 패듯이 패셨어. 그래서 나는 술 마시는 사람이 무척 싫었어. 그래서 어렸을 때 술 마시는 사람에게는 시집을 안가겠다고 다짐했지. 그런데 그 말이 주문이 되었는지 술 안마시는 네 아버지와 결혼하였단다.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는 행복했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진짜로 인생이 먼지 깨달았지.

 

 어머니는 내가 열 한 살 되던 해 네 이모를 낳고 난산으로 돌아가셨어. 그때는 하늘이 가라앉는 것 같았고, 이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죽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어. 문밖에 서 언제라도 들어오실 것 같은 느낌이었어. 지금 환갑이 넘은 나이 이지만 아직도 어머니가 보고 싶어. 사진도 없으니까 이제 어머니 모습도 가물가물 하다.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은데, 꿈에도 안 보이시는 거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자 이모 키우는 것은 내차지가 된 거야. 미군 부대에 가서 분유를 얻어다가 타서 먹였어. 그때는 부엌에서 나무로 불을 때어 물을 데워서 우유를 탔지. 겨울에는 너무도 춥고, 밤에 일어나기가 너무 싫었지만, 그래도 동생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했어. 그리고 달랑 형제라고는 네 이모 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이모를 키우는 것은 참을 만 했어. 문제는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홀로되셨으니 계모가 들락거리기 시작한 거야. 우리 집에 다녀간 계모만도 예닐곱은 될 꺼야. 계모들은 빈 보따리로 왔다가 갈 때는 한 보따리 챙겨가지고 가지. 이렇게 계모들이 들락거리니 살림이 안 남어나지. 가세도 점점 기울더라고. 그리고 계모들은 밥도 안하고 늘 마실만 다녀. 마실도 그냥 다니면 되는데 우리집 흉이나 보고, 내 흉만 보는 거야. 이것이 젤 싫었단다. 이렇게 계모들이 들락거리다가 네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라는 분이 그래도 남아서 우리 집에서 오래 살았지.

 

 또 하나 잊혀지지 않는 것은 육이오 전쟁 때란다. 우리는 피난을 속리산 아래 상주까지 갔단다. 겨울에 춥고 먹을 것은 제대로 없고, 정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 네 이모를 석 달 동안이나 업고 피난길에 올랐지. 속리산 가기 전에 피발령 고개라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을 때는 다리가 부어서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었어.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아버지한테 네 이모를 버리자고 했지. 그러면서 아버지와 한없이 부둥켜 앉고 울었단다. 한참 울고 나신 아버지는 짐을 고개마루까지 갖다 놓고 네 이모와 나를 차례로 업어 고개까지 데려 갔단다. 아버지는 세 번이나 고개를 넘으신거야. 네 이모를 많이 업어서 인지 아직도 허리가 많이 아프다. 어떤 때에는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 같이 아프단다.

 

 이렇게 저렇게 세월이 흘러 열 여섯 되던 해에 공장에 들어갔단다. 집이 너무나 싫어서. 계모가 너무 싫어서 말야. 공장에 오니 너무 좋았어. 일 잘한다고 대접도 해주고, 매일 내가 좋아하는 유행가도 틀어 놓아 너무 좋았단다. 몇 개월 근무하는데, 계모와 아버지가 여식은 공장에 있으면 냉 생긴다고 날 집으로 데려간 거야. 사실은 계모가 밥을 하기 싫어서 그랬던 거야. 그러더니 한 일년 있다가 산골의 네 아버지에게 시집 보낸거야.

 

 시집을 와 보니 토지도 별로 없어 양식 대 먹기도 바빴어. 시어머니는 왜 이리 까탈스러운지. 너도 보았지만 조선시대의 고지식한 시어머니였어. 그리고 네 아버지가 큰집으로 양자로 와서 시어머니가 두 분이셨지. 그래서 시집살이도 두 배로 했지. 시집와서 특히 힘든 것은 네 아버지 군대 갔을 때였어. 젤 힘들었던 것이 산에 가서 나무 하는 것이었지. 정말로 시집와서 고생한 것 이야기하면 며칠 밤을 새도 모자라지. 그래도 요즈음은 너희 오남매가 결혼해서 그럭저럭 사니 행복하단다. 너희 아버지에 대해 불만도 많지만 그래도 아버지에게 잘 해드려라. 이제 얼마나 사시겠냐?

 

 

 이것이 우리 어머니들의 일생이다. 아니 대부분의 가난한 집의 여인네의 일생일 것이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항상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