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치아 교정을 시작했다. 이제는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다. 40대라는 나이에도 치아 교정을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교정기술이 많이 발전한 것 같다. 처음에는 교정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둘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 뭣 하러 치아를 교정하느냐고 묻는다. 또한 친구들은 이렇게 놀려 댄다.
“바람피우려고 치아 교정하는 것 아녀?”
“그래 여자나 소개시켜 주라.”
하면서 농담을 받아치곤 했다.
교정을 마음먹은 것은 회사일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니 회사를 대표해서 중요한 자리에 참석할 일이 많아 졌다. 제멋대로 생겨먹은 치아를 보면 상대방은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아무리 마음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외모도 무시 못 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적극적인 압력도 교정을 시작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 와서 보니 교정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못생긴 치아를 가지게 된 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었다. 치아에 대한 가슴 아픈 사연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린시절 나는 잘 넘어졌다. 수시로 넘어져 무릎의 상처가 성할 날이 없었다. 한 여섯 살쯤으로 기억이 된다. 우리 동네 유일한 이발소가 한군데 있었는데. 그 집 앞 봉당(마루를 놓을 자리에 마루를 놓지 않고 흙바닥 그대로 있는 곳)은 그 당시 귀한 콘크리트로 발려져 있었다. 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뛰고 장난치다가 그 봉당에서 넘어진 것이다.
넘어지는 순간 번갯불이 튄 것 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멍한 감각이 머리 속에 전해졌다. 일어나 보니 입에서 피가 줄줄 흘렀고, 너무 아파서 울 수도 없었다. 아니 너무 아파서 아픔을 느끼게 하는 감각들이 다 어디로 도망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보니 앞니가 부러져 있었다. 부러져서 뿌리만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부러진 이빨 때문에 새로 나올 치아들이 그 자리를 피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남해안의 해안선처럼 자리를 틀고 앉은 것이었다. 그 이빨 뿌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절로 빠졌다. 그 이빨 뿌리가 빠지던 날 속은 시원했으나, 다른 이빨은 다 자라서 아주 이상한 치아의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이 부러진 이빨 때문에 아버지는 이가 흔들리자마자 열심히 뽑아주셨는데도 아버지의 정성이 무색할 정도로 이가 마치 남해안의 해안선처럼 난 것이다. 학창시절 친구들은 이 이빨을 보고 리아스식 해안 이라고 불렀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치아에 대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아마 어려서 외모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시골에서 외모란 늘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하고, 손톱에는 때가 끼어 늘 시커멓고, 옷은 늘 흙투성이였으므로 그까지 이빨은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중학교를 가고 점점 커가면서 치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입을 벌리고, 크게 웃지도 못하고, 남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싫고 하다가 보니 성격도 점점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신학기가 되어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은근히 무시하는 것을 동물적 감각을 통해 감지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러한 무시를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은 지금은 별것이 아니지만 학교 성적을 통해서 이겨낼 수 있었다. 은근히 무시하던 아이들도 자기들보다 성적이 높게 나오니 은근 슬쩍 꼬리를 내렸다. 그래서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치아를 교정하는 일이라고 늘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놀림도 많이 받고, 은근히 무시하던 녀석들에게 보란 듯이 멋지게 나타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치아교정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하기가 힘들었다.
또한 집에서도 걱정이었다. 나이가 드니 결혼을 시켜야하는데 치아에 문제가 있으니 결혼하는데 걸림돌이 될까봐 은근히 걱정을 하였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나중에 선보러 갈 때 크게 웃지 말라고 어렸을 때부터 신신 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이빨 때문이었는지 선도 그렇게 많이 보지 않고 결혼하게 되었다. 진짜로 선을 보고 결혼을 하려고 하였다면 결혼을 못하고 아직까지도 총각으로 남아있을 지도 모르겠다. 다행이 나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지금의 집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사진을 찍을 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찍었다. 결혼사진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사진에는 치아를 드러내고 멋지게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다.
치아교정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치아에 부착된 교정 장치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장치를 붙이고 나서 치아를 당기면 뻐근한 통증이 온다. 하지만 이 통증은 참을 만 하다. 문제는 음식물이 낀다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마다 주렁주렁 걸리는 밥찌꺼기, 반찬 찌꺼기들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양치질에 괴롭히는 것이다. 장치가 붙어 있으니 양치질이 제대로 안된다. 전보다 몇 배 더 노력을 해도 깨끗이 닦이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치과에서 이를 제대로 관리 못했다고 야단을 많이 맞았다.
멋있어 지려고 하니 많은 고통이 뒤따르는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 고통은 참을 만 한 것이었다. 거울 앞에 서면 당당해지는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교정 전에는 거울 앞에서 주눅이 들었었다. 거울 앞에 서는 것이 싫었다. 이제는 거울 앞에서도 환하게 웃을 수 있다. 거울 앞에 서면 멋진 남자가 나를 보고 웃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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