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수필

숫자로 만든 번호 때문에 이름을 빼앗기고 있다.

행복한 까시 2010. 7. 26. 12:51

 

#아파트에서


 도시에 죽 늘어선 아파트에는 문패가 없다.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은 문패 대신 집집마다 번호가 표시되어 있다.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는 것보다 번호를 적어 놓는 것이 더 쉽게 집을 찾을 수 있다. 아파트 현관 문짝에는 모든 집들이 번호가 표시되어 있다. 번호는 대개 층수와 통로를 의미한다. 집의 홋수를 보면 몇 층에 살고 있는지 몇 번째 통로에 살고 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앞자리의 번호는 층수이고, 뒷자리의 번호는 통로의 번호를 알려주는 표시이다.


 이처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름이 없다. 그냥 홋수로 불리어 진다. 다른 집 이야기를 하려면 홋수나 동수로 이야기 한다.

 

 “ 905호 그 집은 아저씨가 선생님이래. 애가 하나인데 공부를 무척이나 잘한대.”

 

 “ 1205호는 소리 소문도 없이 이사 갔대. 아마 무슨 일이 있었나봐.

   조용히 이사 간 걸 보면 아마 안좋은 일이겠지.”

 

 “ 옆집 806호 딸내미는 시집간대. 저번에 남자친구 데리고 오는 것 같더니만 결혼을 하네.

   우리 결혼할 때만 해도 아이였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네.”

 

 “ 우리가 아는 102동 아줌마 있잖아.

   저 번에 등산 갔다가 사귀었는데, 주식을 해서 돈을 엄청 벌었대.

   그쪽 방면으로 재주가 좋은 가봐.”


 아내가 이웃집 이야기를 간간히 할 때면 아파트 홋수가 불려진다. 주인아저씨나 아주머니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홋수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파트에 살면 이름이 실종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805호 아저씨나 805호 아줌마로 불려질 것이다.     


#은행에서


 요즘은 은행을 자주 가지 않는다. 은행에 갈 시간도 없지만, 인터넷 뱅킹이라는 것 때문에 굳이 은행에 갈 필요가 없고, 간혹 은행에 가더라도 자동 입출금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은행원들과 접촉하기 쉽지 않다. 은행에 가면 가장 먼저 들어오는 풍경은 은행원들 앞에 서 있는 번호판이다. 모든 고객은 번호로 표시된다. 먼저 온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지고 있다. 은행에 가서 빨리 일을 처리하려면 번호표부터 뽑아야 한다. 처음 가는 은행이라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번호표를 어디서 뽑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재빠르게 번호표를 뽑아야 5분에서 10분 정도 시간을 벌 수 있는 것이다.


 한사람씩 은행 업무가 처리될 때마다 벨이 ‘딩동, 딩동’울려 댄다. 다음 사람이 업무를 볼 차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벨 소리와 함께 은행원이 부른다.

 

 “452번 고객님 3번 창구로 와 주십시오.”

 

 불러도 대답이 없으면 다음 번호가 불려진다.

 

 “453번 고객님 3번 창구로 와 주세요.”

 

 이처럼 은행에서는 고객들이 그날그날 주워지는 하나의 번호인 것이다. 은행에서 번호로 불려지는 고객들의 기분은 그리 썩 유쾌한 것은 아니다.    


#방송에서


 요즘은 휴대폰 때문에 방송도 활기가 넘친다. 휴대폰의 문자 메시지가 방송 진행자와 청취자가 쌍방향 실시간으로 쌍방향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엽서나 편지로 소통하였다. 열흘 전에 보내야 방송을 탔었는데, 요즘의 휴대폰은 10분 정도면 방송을 타는 것 같다. 열흘이란 기간이 10분으로 단축된 것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실시간 휴대폰으로 정보를 주고받다가 보니 방송이 생동감이 넘친다. 그리고 청취자가 방송을 이끌어 간다는 기분도 든다. 일방적으로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청취자의 의견이 즉시 방송에 반영되기도 한다. 이렇게 좋은 면도 있지만 청취자들이 번호로 불려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름도 많이 불려지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번호로 불려진다.


 “이번에는 4801번님이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5100번님이 박강성의 ‘장난감 병정’을 신청하셨습니다.”

 

 “3982번님 퀴즈에 당첨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마도 현대인들이 이름을 밝히는 것을 꺼려해서 번호가 많이 불릴지도 모르겠다. 나 같은 경우도 알려지는 것이 싫어해서 블로그에 사는 곳이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밝히지 않는 것이 마음이 편안하다. 인터넷이란 공간이 워낙 많은 사람들이 보다가 보니 밖으로 노출되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심리 때문에 방송에서도 이름 보다는 전화번호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구분 짓는 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학교에서도 번호가 자주 불려진다. 매 학년마다 번호가 바뀌지만 한번 정해진 번호는 일년 동안 내 이름이 되는 것이다. 선생님들도 이름보다는 번호를 더 많이 부른다. 특히 학생들에게 질문을 할 때면 대부분의 선생님은 번호를 부른다. 많은 학생들의 이름을 알기도 어렵고, 외우기도 힘드니 번호가 편할지도 모를 일이다.


 학창시절 선생님들도 장난기 섞인 방법으로 학생들의 번호를 이용했다. 날짜에 따라 번호가 불려지니 자신의 끝 번호와 날짜의 번호가 일치하는 날이면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날이 5일이라면 5자가 들어 있는 번호들 5번, 15번, 25번, 35번, 45번, 55번은 질문 세례를 받는 날이었다. 그 번호 중에 공부 잘하는 아이가 끼어 있으면 질문은 멈춰지지만 한사람도 대답을 못하면 5번 다음에 있는 6번도 무사하지 못했다. 학창시절 이름 보다는 번호로 불려지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힘없는 학생의 입장에서 어쩔 수 가 없었다.


 그런데 번호를 가지고 장난스럽게 학생들을 이용하던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이직도 기분이 씁쓸하다. 하긴 선생님들도 사람이니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지루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이름 보다는 번호나 숫자가 많이 불려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만큼 숫자로 구분하는 것이 편리하기도 하고,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일 것이다. 숫자나 번호로 불려지는 세상에서 인간미나 정 같은 것은 점점 메말라 간다. 효율성과 개인을 보호한다는 명분만이 이름을 대신하여 번호를 부른다는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