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풍경

할머니와 화롯불에 대한 추억

행복한 까시 2016. 1. 19. 07:30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겨울 다운 날씨이다. 추운 겨울이 오면 자연스럽게 화롯불과 할머니가 생각이난다. 어린 시절 날씨가 추워지는 계절이 오면 시골집 방안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각 방문마다 창호지를 새것으로 바르는 것으로 겨울 준비가 시작된다. 그 동안 구멍이 나서 누더기처럼 땜질한 문은 칙칙했는데, 창호지를 바르고 나면 마치 문을 새것으로 바꾼 것처럼 방이 한결 깨끗해졌다. 아랫목에서는 청국장이 띄우고, 윗목에는 시렁에 메주를 매달아 놓았다. 그래서 방은 메주와 청국장 냄새로 몸살을 앓았다. 우리에게는 친근한 냄새이고, 일상생활에서는 꼭 필요한 음식이지만 왠지 감추고 싶은 냄새였다. 요즈음은 웰빙 이라며 된장이나 청국장을 많이 먹고 선호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외국 문물의 영향으로 도회지에서는 그리 선호하는 음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런 방안의 풍경과 함께 방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물건이 바로 화로였다.


 화로는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난 후 남은 불을 담아 두는 도구이다.

과거에는 흙으로 구운 질화로가 널리 사용되었는데, 너무 무거워서 들고 다니는데 불편할 뿐만 아니라 쉽게 깨지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후에는 쇠로 만들어진 화로가 등장했다. 쇠로 만들어진 화로는 가볍고 잘 깨지지는 않았지만 쇠붙이의 특성상 열전도율이 너무 높아 손잡이까지 뜨거워서 운반하는데 불편한 점과 화로 쇠붙이가 뜨거운 열에 의해 점점 얇아지는 단점이 있었다. 난방이 시원치 않았던 과거 주택에서 화로는 방안의 온도를 높여주는 난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화로에서 발산하는 열은 방안의 윗 풍도 감쪽같이 없애주는 역할을 하였다.


 화로는 어른들이나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존재였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에게는 겨울철에 온기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존재였으며, 또한 담뱃불을 붙이는 라이터와 같은 역할도 했다. 아이들에게는 간식을 먹기 위한 필수 도구였다. 밥을 먹고 나서 출출할 때, 또는 밥이 먹기 싫을 때 화로에다 고구마를 묻어두면 노릇노릇하게 구워졌다. 간혹 하얀 김을 내뿜으며 고구마가 익어갔다. 어떤 때는 고구마가 익는 것을 참지 못하여 덜 구워진 고구마를 먹기도 했고, 너무 오래 굽거나 센 불에 구워 반쯤 타버린 고구마를 먹은 적도 있었다. 고구마를 굽는다고 화로를 쑤셔대면 방안에는 재가 날아다녀 방안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또한 그 당시 귀한 라면을 끓여 먹는 열기구였다. 화로의 불이 약해서 제대로 끓여지지 않은 설익은 라면도 왜 이리 맛있던지 완전히 별천지 음식이었다.


 또한 화로는 어머니들이 밥을 지을 때 주방기구 역할을 단단히 하였다.

밥을 할 때는 된장찌개도 끓여 내었으며, 점심을 먹을 때에는 밥을 데우거나 국을 데울 때 아주 요긴하게 쓰였다. 그 뿐이 아니다. 숭늉을 데울 때에도 사용하였고, 겨울에 김치 볶음밥이나. 김치찌개를 끓일 때에도 사용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화로는 가스렌지의 역할을 했던 것이었다. 끼니때가 되면 남편과 아이들을 기다리며 어머니들은 찌개를 데워가며 기다렸다. 화로 위에서 보글보글 소리와 냄새를 피워가며 끓던 된장찌개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찌개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을 때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함께 끓었다. 그 시절 화로는 사랑과 정이 피어나는 도구였던 것이다.


 바늘 가는데 실이 가듯이 화로에는 인두와 부젓가락이 함께 있었다.

부젓가락은 화로를 다독거리는데 사용하였으며, 인두는 어머니들 바느질을 할 때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옷을 지을 때, 특히 한복을 지을 때 주름을 펴기 위해서 인두를 불에 달구어 사용하였다. 아이들은 인두와 부젓가락을 가지고 많은 장난을 하였다. 성냥을 화로에 넣으면 황에 불이 확 피어오르는 것이 재미있어 많은 성냥을 화로에 넣었으며, 또한 황을 잘게 부수어 화로에 뿌리면 마치 불꽃놀이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번쩍번쩍 불이 피어올랐다. 그러면 방안은 황 냄새가 가득 차기도 하였다. 어른들에게 혼나면서도 성냥을 가지고 하는 불장난은 재미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위험한 불장난이었던 것이다. 또한 누나들을 부젓가락을 달구어 머리를 꼬불꼬불하게 모양을 내기도 하였다. 부젓가락의 열이 머리카락에 전달되어 마치 파마한 것처럼 곱슬곱슬한 머리가 만들어졌다. 이런 모습은 그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화로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방안에 화로를 들여놓은 처음 며칠간은 화로에서 나오는 덜 연소된 가스 때문에 머리가 많이 아팠다. 머리가 아프지 않으려면 며칠동안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심할 때에는 구토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동치미 국물과 함께 무를 먹이곤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무척 아팠던 기억이 난다.


 화로를 생각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사람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겨우내 화로를 옆에 끼고 사셨다. 즉 화로와 동고동락을 하시며 화로를 애지중지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할머니도 화로도 다 세월이 저편으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노환으로 돌아가셨고, 화로는 시골집 아궁이에 나무를 때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우연의 일치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 할머니와 화로는 끈끈한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추운 겨울을 생각하면 시골집 사랑방 화로 옆에서 불을 쬐고 계시던 할머니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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