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 이야기

아이들과의 약속 어른들끼리 약속보다 중요하다.

행복한 까시 2011. 1. 18. 07:10

 

 작은딸이 교과서에 이름을 써 달라고 한다.

교과서에는 스티커가 붙여 있다. 스티커에 이름을 써 달라고 한다. 오랜만에 글씨를 쓰려니 손이 떨린다. 컴퓨터가 발달되고 나서는 글씨 쓸 일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글씨가 잘 써지지 않는다. 그래도 옛날에 쓰던 감각으로 예쁘게 써 주었다.


 다 써주고 나서 작은 딸에게 제안을 했다.


 “야, 이것 컴퓨터로 써서 붙이면 간편하겠다. 글씨도 더 예쁘고.”


 그랬더니 그렇게 해 달라고 한다. 작은 딸과 글씨체를 골라 스티커 양식에 이름을 써 넣었다. 회사에 가서 출력을 해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한마디 한다.


 “야, 너희 아빠 그것 출력해 오려면 석 달 열흘 걸린다. 믿지 마라.”


 맞다. 약속해 놓고 잘 잊어버린다. 잊어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핑계인 것 같지만 회사에 오면 집에서 일어 난일을 까맣게 잊는다. 이런 나를 잘 알기에 꼭 필요한 사항은 아내가 문자를 넣는다.


 한참 일하고 있는데, 문자가 도착했다.

 ‘아빠 스티커’

아주 짧게 문자가 왔다. 작은 딸이 보낸 것이다. 스티커를 잊지 말라는 경고이다. 문자를 보고 바로 출력을 해 놓았다. 정신을 놓으면 퇴근 할 때 그냥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들과의 약속은 꼭 지켜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은 약속을 꼭 기억한다. 하루 종일 약속만 기억하고 있다. 반면에 어른들은 약속을 금방 잊는다. 바빠서 잊고, 정신이 없어서 잊고, 아이들과의 약속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잊는다. 어른들이 약속을 잊으면 아이들은 상처를 받는다. 


 어린시절이 아버지의 약속이 생각난다.

아버지에게 색실을 사다 달라고 졸랐다. 옆집 친구가 가지고 놀던 색실이 너무 탐이 났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장에 가면 색실 좀 사다줘, 연 날릴 때 쓰게”

“그래 꼭 사다 주마”

 

아버지의 대답이 못미더워 다시 한번 다짐을 하였다.

 

“정말 사다 줄 꺼지”

“그럼 꼭 사다 준다니까”

 

그 대답을 듣고, 기분이 좋아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놀면서도 빨리 장날이 와서 아버지가 색실을 사왔으면 하는 생각이 간간히 들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장날이 왔다. 아침부터 장에 가신 아버지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날은 왜 이리 시간이 더디 가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놀아도 해는 그대로 인 것 같았다. 해가 서산에 걸려야 아버지가 오시는데 하면서 해가 넘어가기만 기다렸다. 늦은 오후 드디어 아버지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너무나 반가웠다.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온 나는 보따리부터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색실은 없었다. 그 대신 보따리에 형의 도시락과 예쁜 숟가락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화가 너무 나서 왜 색실을 사오지 않으셨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억울해서 울음만 나올 뿐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버지가 미울 뿐이었다. 계속 울고 있으니까 할머니를 비롯한 어른들은 내가 숟가락이 탐이 나서 우는 줄 알고 숟가락을 내가 주며 달랬다. 하지만 숟가락은 내게 그리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나의 마음은 오로지 색실을 사오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가득 차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기도 하다. 그때 아버지는 왜 색실을 사오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아마도 아버지는 나와의 약속을 하찮게 생각하고 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설령 잊지 않았다고 해도 어린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색실이 아버지에게는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올 필요성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오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나 돈이 부족해서 사오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관심사가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에게 거짓말이나 공허한 약속에 대한 실망은 너무도 크다. 어른들의 세계는 넓어서 거짓말도 쉽게 잊을 수 있지만 아이들의 세계는 너무 작기 때문에 그 약속이 아이들에게는 전부이기 때문에 쉽게 인정하거나 잊기 어렵다. 그래서 상처가 너무 큰 것이다.


 요즘은 나 자신도 아버지처럼 변해가고 있다. 아이들과 약속을 쉽게 잊는다. 시간이 없어서 지키지 못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지키지 못하고, 잊어버려서 지키지 못한다. 아버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들과 약속을 하찮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과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점만 우리 두 딸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희망사항이다.